해외문화유산 "일본 천년고도" 답사기
- 성균인문동양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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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5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서
(12기 여인선, 채널A 기자)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하늘, 교토 외곽의 광륭사 안이었습니다.
"저는 한번만 더 보고 오겠습니다. 너무 아까워서..."
교수님은 수줍게 말하며 다시 영보전 안으로 발을 돌렸습니다. 이 안에는 일본의 국보 1호,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서 여러 차례 보았던 금동 반가사유상의 그 미소… 방금 보고 나온 목조반가사유상과 너무나도 닮았습니다. 두고 오기 아까운 고 교수님의 그 마음이 이해가 됐습니다.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은 일본의 국보이지만 신라에서 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불상이 도둑질이나 약탈로 건너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불교 전파를 위해 일본으로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전설 속 시대, 두 나라가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증거인 것이지요. 담징의 금당벽화로 유명한 나라의 호류지에서도 익숙함을 느꼈습니다. 기와 지붕의 곡선이 편안했습니다. 고대의 일본 유적에서 우리는 두 나라의 '닮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디부터 달라진 것일까요. 닮은 불상을 쌍둥이처럼 갖고 있던 두 나라는 용서하기 어려운 침략의 역사를 두 번이나 건너왔습니다. 불상이 보여줬던 온화한 얼굴은 무시무시한 무사의 얼굴로 바뀌어갔습니다.
사카모토 료마의 흔적을 찾아간 교토의 호국 신사에는 전범들의 위패도 합사돼 있었습니다. 가이드님은 전범들의 가족이 원해도 위패를 뺄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뿌리부터 자신의 분수를 알고, 죽어서도 전체에 순종해야만 하는 와(和) 문화가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지금도 일본은 소수가 대대손손 가업으로 정치를 하고, 자민당 ‘독재’가 60년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야가 매 정부 치열하게 대치하며 안에서 시끄러운 우리와 다른 모습입니다.
어떤 원우님은 여행이 끝나고 자신이 일본의 와(和) 문화와 비슷하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돌아봤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조직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고. 평소 존경하는 원우님의 생각을 듣고 제 자신도 돌아봤습니다. 적당히 모범생으로 살아온 저 역시 내 자리가 어딘가 끊임없이 불안해하며 마치 부품처럼 경직된 얼굴로 살아온 것 같습니다.
다시 반가사유상의 얼굴로 돌아옵니다.
“지상의 시간과 속박을 넘어서 달관한 인간 실존의 가장 깨끗하고, 가장 원만하고,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징.”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목조반가사유상을 보고 남긴 찬사입니다. 다소 고통스럽게 고뇌하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달리 반가사유상은 그저 자유로워 보입니다. 생각 중에 아무런 속박이 없습니다. 편안하고 평화롭습니다.
저는 여행 중 우리 ‘성인동’에서 반가사유상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찌는 더위 속 에어컨 앞자리를 서로에게 양보하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던 장면, 형님 아우 나서서 밥값, 술값, 편의점 아이스크림과 캔 맥주까지 푸근하게 나누던 정 많은 순간들. 갑작스런 무대에도 실력을 뽐내며 화합하는 근사한 풍류. 학창시절 수학여행을 떠난 친구들처럼 자유롭게 많이 웃었고, 서로 편안했고 참 따뜻했습니다. 2박 3일 만에 한 분 한 분의 얼굴이 너무나 소중해졌습니다.
그런 얼굴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닮은 듯 많이 달랐던 옆 나라에서 저는 우리의 얼굴을 배우고 왔습니다.